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감히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을 이 비평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엔 이것말고는 나의 번뇌의 원천을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감히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질문을 이 비평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것엔 이것말고는 나의 번뇌의 원천을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사념
그것이 뭔지 모를 때는 보통 그것이 잘 풀리지 않을 때다. 나는 6년간 4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우습게도 4년 전 대학에서 찍은 첫 영화가 호평을 받았을때 에는 영화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지난 그 오만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언젠가 이 일을 평생 한다면, 어차피 해야 할 고민. 본질. 요즈음엔 영화를 정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러 사람에게 내 정의를 검증받아 보고 수정해 나간다. 2026년 5월 현재 나의 영화의 대한 정의는 이러하다
영화란 극장이라는 집단적 관람 환경과 미학을 전제로 잉태되어, 궁극적으로 매체나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관객과 교감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영상 예술이다.
이 정의를 내리는 데에는 소거법이 활용되었는데 대충 이러한 가정이다.
”드라마는 영화인가?”, ”아니다”, “그럼 왜 아닌것인가?” ”Ai로 만들어진 영화는 영화인가?”, “그렇다”, “그럼 왜 그런것인가?” ”유튜브는 영화인가?”, “영화가 유튜브로 올라왔다면 영화이지만 유튜브 콘텐츠는 영화가 아니다.”
이러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한 답들로 일궈낸 정의는 실리적일 수밖에없다. 무언가 부족하고 본질에 닿지 못한 기분이 들던 어느 때였다. 나의 애인이 갑자기 “신기해”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인지 물어봤고 그 대답은 이러했다. ”사람들이 말을 하잖아, 말을하고 말을 적어. 그걸 읽어 우리가, 너무 신기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어는 진화의 산물이다. 문자 역시 언어의 일부이기에 그러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의 역사를 애인에게 설명해 주었다. 돌고래도 대화를 하고 침팬지도 대화를 한다. 20만년전 인류역시 대화를 했다. 우리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이 생존에 유리한 개체들이 모인 결과이기에 소리를 내는 기관을 통해 소통을 했다. 5000년전 추정컨대 문자가 탄생했다. 갑골문자와 상형문자의 형태라고 추측한다. 갑골문자는 거북이 등껍질이 갈라진 형태를 보고 의미를 불어넣은 것이고, 상형문자는 사물의 형태를 본떠 문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둘은 다르지 않으며 갑골문자가 상형문자에 포함된다. 발현 과정이 다를뿐 그렇게 문자를 발명한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왔다. 계속 정의 내려가고 개념을 만들어가며.
서론
개념. 나는 개념은 관념의 집합이라 본다. 하지만 관념은 개념의 집합이 되기도 한다. 예술 매체는 이 두 개를 필요로하는데 그 어떤 예술도 관념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와 화자가 없는 예술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작품이 아닌 상품의 형태일 수 있지만 상품 또한 관념을 필요로한다.
앙드레 바쟁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의 서문엔 “영화의 이념”의 대목에서 이러한 통찰이 등장한다. "영화는 영화를 가능하게 한 기술(기계)이 발명되기 전부터, 인간의 머릿속에 이미 '온전한 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관념'으로 존재해 왔다” 즉 기술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 기술을 영화라는 형태로 견인해 왔다는 발상이다.
이 대목을 읽자, 무언가 정리되는 기분이였다.
본론
흔히 기술의 발명이 새로운 매체를 탄생시켰다고 믿는다. 점토판과 종이가 발명되어 문자가 생겼고, 카메라와 필름이 발명되어 영화가 등장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이 인과관계를 뒤집는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의 정신 속에는 이미 '영화'라는 이념이 존재해 왔다고 보았다.
인간이 마주한 최초의 한계는 사유의 휘발성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개념, 신화,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문자의 발명은 이 보이지 않는 관념에 '육체'를 부여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거북이의 뼈에 새긴 갑골문자부터 점토판의 설형문자까지,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관념과 통치 개념을 단단한 물질 위에 새겨 넣었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써 인간의 관념은 비로소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인류의 공통 자산으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즉, 문자는 인간의 추상적 정신을 외부 세계에 정착시킨 최초의 '재현 매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문자는 추상적인 기호이기에, 인간이 가진 '세계 전체를 온전히 감각하고자 하는 관념'을 완벽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인간은 늘 글자 너머의 생생한 현실, 즉 빛과 소리, 그리고 움직이는 시간을 통째로 움켜쥐기를 열망했다. 바쟁이 말한 '토탈 시네마(Total Cinema)의 신화'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완벽한 현실 재현이라는 이념을 이미 머릿속에 품고 있었고, 그 관념의 인력(引力)이 마침내 19세기 말 사진과 필름이라는 기술적 발명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따라서 영화는 갑자기 튀어나온 근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동굴 벽화에 달리는 동물의 다리를 여러 개 그리던 순간부터, 문자를 통해 세계를 묘사하던 순간을 거쳐 도달한 '관념의 총체적 발현'이다. 문자가 사유를 추상적 기호로 고착시켰다면, 영화는 그 사유를 현실의 시공간과 완벽히 일치하는 구체적 물질로 완성해 낸 것이다.
결론
관념이 지속되는 한, 영화는 소멸하지 않는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과 AI, 가상현실의 범람 속에서 영화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필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매일 밤이 괴로웠다. 사진기가 발명될 당시에 화가인 기분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매체의 외형적 변화는 본질을 위협하지 못한다. 영화의 본질이 기계 장치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과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한 영화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문자가 종이의 시대를 넘어 디지털 텍스트로 여전히 살아 숨 쉬듯, 영화 역시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틀을 넘어 인간의 이념을 시각화하는 모든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진화해도 인간에게는 '자신의 관념을 타인에게 온전한 세계의 형태로 보여주고 공유하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열망과 관념이 존재하는 한, 영화는 이름을 바꾸어 갈 뿐 영원히 인류와 함께할 것이다.
영화란 열망과 관념의 집합체란 이데아의 표상이다.
제길.. 결국 플라톤이 옳았잖아…
사념
그것이 뭔지 모를 때는 보통 그것이 잘 풀리지 않을 때다. 나는 6년간 4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영화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우습게도 4년 전 대학에서 찍은 첫 영화가 호평을 받았을때 에는 영화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아직 지난 그 오만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언젠가 이 일을 평생 한다면, 어차피 해야 할 고민. 본질. 요즈음엔 영화를 정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러 사람에게 내 정의를 검증받아 보고 수정해 나간다. 2026년 5월 현재 나의 영화의 대한 정의는 이러하다
영화란 극장이라는 집단적 관람 환경과 미학을 전제로 잉태되어, 궁극적으로 매체나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관객과 교감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영상 예술이다.
이 정의를 내리는 데에는 소거법이 활용되었는데 대충 이러한 가정이다.
”드라마는 영화인가?”, ”아니다”, “그럼 왜 아닌것인가?” ”Ai로 만들어진 영화는 영화인가?”, “그렇다”, “그럼 왜 그런것인가?” ”유튜브는 영화인가?”, “영화가 유튜브로 올라왔다면 영화이지만 유튜브 콘텐츠는 영화가 아니다.”
이러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한 답들로 일궈낸 정의는 실리적일 수밖에없다. 무언가 부족하고 본질에 닿지 못한 기분이 들던 어느 때였다. 나의 애인이 갑자기 “신기해”라고 말했다. 나는 무엇인지 물어봤고 그 대답은 이러했다. ”사람들이 말을 하잖아, 말을하고 말을 적어. 그걸 읽어 우리가, 너무 신기해”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어는 진화의 산물이다. 문자 역시 언어의 일부이기에 그러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의 역사를 애인에게 설명해 주었다. 돌고래도 대화를 하고 침팬지도 대화를 한다. 20만년전 인류역시 대화를 했다. 우리는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관이 생존에 유리한 개체들이 모인 결과이기에 소리를 내는 기관을 통해 소통을 했다. 5000년전 추정컨대 문자가 탄생했다. 갑골문자와 상형문자의 형태라고 추측한다. 갑골문자는 거북이 등껍질이 갈라진 형태를 보고 의미를 불어넣은 것이고, 상형문자는 사물의 형태를 본떠 문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둘은 다르지 않으며 갑골문자가 상형문자에 포함된다. 발현 과정이 다를뿐 그렇게 문자를 발명한 인류는 이렇게 발전해왔다. 계속 정의 내려가고 개념을 만들어가며.
서론
개념. 나는 개념은 관념의 집합이라 본다. 하지만 관념은 개념의 집합이 되기도 한다. 예술 매체는 이 두 개를 필요로하는데 그 어떤 예술도 관념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와 화자가 없는 예술을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은 작품이 아닌 상품의 형태일 수 있지만 상품 또한 관념을 필요로한다.
앙드레 바쟁의 저서 <영화란 무엇인가>의 서문엔 “영화의 이념”의 대목에서 이러한 통찰이 등장한다. "영화는 영화를 가능하게 한 기술(기계)이 발명되기 전부터, 인간의 머릿속에 이미 '온전한 세계를 재현하고자 하는 관념'으로 존재해 왔다” 즉 기술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 기술을 영화라는 형태로 견인해 왔다는 발상이다.
이 대목을 읽자, 무언가 정리되는 기분이였다.
본론
흔히 기술의 발명이 새로운 매체를 탄생시켰다고 믿는다. 점토판과 종이가 발명되어 문자가 생겼고, 카메라와 필름이 발명되어 영화가 등장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영화 비평가 앙드레 바쟁(André Bazin)은 이 인과관계를 뒤집는다. 그는 영화라는 매체가 물리적으로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인간의 정신 속에는 이미 '영화'라는 이념이 존재해 왔다고 보았다.
인간이 마주한 최초의 한계는 사유의 휘발성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개념, 신화, 그리고 세계에 대한 관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문자의 발명은 이 보이지 않는 관념에 '육체'를 부여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거북이의 뼈에 새긴 갑골문자부터 점토판의 설형문자까지,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관념과 통치 개념을 단단한 물질 위에 새겨 넣었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써 인간의 관념은 비로소 시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고 인류의 공통 자산으로 축적되기 시작했다. 즉, 문자는 인간의 추상적 정신을 외부 세계에 정착시킨 최초의 '재현 매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문자는 추상적인 기호이기에, 인간이 가진 '세계 전체를 온전히 감각하고자 하는 관념'을 완벽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인간은 늘 글자 너머의 생생한 현실, 즉 빛과 소리, 그리고 움직이는 시간을 통째로 움켜쥐기를 열망했다. 바쟁이 말한 '토탈 시네마(Total Cinema)의 신화'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완벽한 현실 재현이라는 이념을 이미 머릿속에 품고 있었고, 그 관념의 인력(引力)이 마침내 19세기 말 사진과 필름이라는 기술적 발명을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따라서 영화는 갑자기 튀어나온 근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인들이 동굴 벽화에 달리는 동물의 다리를 여러 개 그리던 순간부터, 문자를 통해 세계를 묘사하던 순간을 거쳐 도달한 '관념의 총체적 발현'이다. 문자가 사유를 추상적 기호로 고착시켰다면, 영화는 그 사유를 현실의 시공간과 완벽히 일치하는 구체적 물질로 완성해 낸 것이다.
결론
관념이 지속되는 한, 영화는 소멸하지 않는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과 AI, 가상현실의 범람 속에서 영화의 위기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필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매일 밤이 괴로웠다. 사진기가 발명될 당시에 화가인 기분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매체의 외형적 변화는 본질을 위협하지 못한다. 영화의 본질이 기계 장치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과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고 사유하는 한 영화는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문자가 종이의 시대를 넘어 디지털 텍스트로 여전히 살아 숨 쉬듯, 영화 역시 스크린이라는 물리적 틀을 넘어 인간의 이념을 시각화하는 모든 형태로 지속될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진화해도 인간에게는 '자신의 관념을 타인에게 온전한 세계의 형태로 보여주고 공유하려는 열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열망과 관념이 존재하는 한, 영화는 이름을 바꾸어 갈 뿐 영원히 인류와 함께할 것이다.
영화란 열망과 관념의 집합체란 이데아의 표상이다.
제길.. 결국 플라톤이 옳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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